데스튀트 드 트라시: 이데올로기 단어의 탄생
-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만든 이는 계몽주의 철학자인 데스튀트 드 트라시다. 프랑스 혁명 이후 트라시는 관념의 생산방식과 작동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이데올로기라는 학문을 제창한다.
- 이데올로기 Ideologie 라는 단어 자체는 Idea와 Logos의 합성어로 관념/이념에 대한 과학이라는 뜻이다.
나폴레옹: 경멸적 의미의 ‘이데올로그'
- 이데올로기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나폴레옹 시기이다.
- 트라시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계승해 정부정책화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자처하던 나폴레옹이 점점 독재자적 성향을 보이자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나폴레옹을 비판 및 견제한다.
- 이러한 과정에서 나폴레옹이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가 이데올로그 Ideologue / Ideologiste 이다. 나폴레옹은 이들을 ‘국가 통치를 전혀 모르며 추상적 이념에 집착해 무익한 논의만 하는, 탁상공론에 빠진 몽상가’라고 비난한다.
마르크스, 엥겔스: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개념화
- 맑스와 엥겔스는 관념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를 부정적으로 개념화한다.
- “이데올로기는 본질이 아닌, 겉으로 드러난 현상 그 자체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이해이거나, 역사에 대한 완전한 추상화 작업이다”
- 이데올로기는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여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며,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보편의 이해관계처럼 보이도록 정당화한다. 이는 중간계급들이 참된 계급의식이 아닌 허위의식을 갖도록 한다. 국가는 계급지배의 도구로서 이데올로기를 통해 경제적 지배계급이 정치적 지배계급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도구이다.
- 이데올로기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비유할 수 있는데, 카메라의 상처럼 현실을 전도시키기 때문이다.
- 전도된 삶의 모습은 자본주의에서 상품물신주의의 형태로 드러난다. 물신이 뭘까? 자신을 생산한 이로부터 독립해 독자적 생명을 갖춘 사물을 물신이라 부르는데,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은 자신을 만든 생산자인 노동자로부터 독립되어 생명을 갖춘 듯이 존재하고, 오히려 사람을 지배한다. 상품을 생산한 이들의 사회적 관계는 사라져버리고 상품들만, 즉 사물들의 관계만이 남는 것이다. 이같은 상품물신주의의 최종적 형태가 화폐물신주의인데,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형태인 것이다.
- 이윤, 이자, 지대를 생각해보자.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품의 가치를 그대로 지급받지 못한다. 일부 잉여가치는 자본가에게는 이윤의 형태로, 금융업자에게는 이자의 형태로, 토지 소유자에게는 지대의 형태로 돌아간다. 애초에 잉여가치를 만든 노동자는 맥락에서 삭제되고, 이윤은 자본이, 이자는 돈이, 지대는 토지가 나은 것처럼 사물간의 관계만이 남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된 삶의 현실이다.
레닌: 이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
- 레닌은 그동안 부정적으로 사용된 이데올로기를 다시 뉴트럴한 단어로 돌려놓는다.
- 레닌은 이데올로기를 ‘이념'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투쟁 등 중립적인 용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칼 만하임: 세계관으로서의 이데올로기
-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세계관'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때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결국 만하임의 주장에 따르면, 맑스주의도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다. 그는 맑스주의도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특수한 세계관으로서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 그는 세계관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다음과 같이 나뉜다고 봤다.
- 부분적 이데올로기 vs 전체적 이데올로기
- 특수적 이데올로기 vs 보편적 이데올로기
안토니오 그람시: 헤게모니
- 헤게모니는 피지배집단의 능동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적, 도덕적, 정치적 능력을 의미한다. 헤게모니를 통해 지배계급의 동의에 의한 지배가 가능해진다. 헤게모니는 이러한 점에서 강제, 힘, 폭력과 반대되는 동의와 설득의 지배 도구라 볼 수 있다.
- 헤게모니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개념이기는 하다. 단순 물리적 폭력과 강제력을 넘어 의식과 정신적 차원의 지배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는 뭐가 다른가? 그람시는 기존 맑스와 엥겔스의 토대와 상부구조와 별개의 공간인 시민사회를 따로 상정한다. 이 시민사회라는 공간에서 등장하는 것이 헤게모니, 동의에 의한 지배라는 것이다.
- 그렇지만 우리는 헤게모니와 물리적 폭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데, 사실 지배집단이 피지배집단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배경에는 물리적 폭력과 강압력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법에 의한 지배가 가장 대표적이다. 결국 헤게모니는 필연적으로 동의와 강제력의 결합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그람시는 국가를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합으로 본다. 결국 통치는 정치사회, 지배계급이 시민사회를 헤게모니로서 장악해나가는 과정이 된다.
- 이전에는 국가 기관이나 지역을 장악하면 끝나버리는 기동전의 형태로 투쟁이 일어났다면, 그람시가 생각하는 근대 헤게모니 투쟁은 진지전이다. 동의를 통해 천천히 시민사회를 장악해가지 않고 물리적 폭력을 통해서만 국가를 장악할 경우 Fragile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이 같은 헤게모니 투쟁의 수단으로서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한다. 민중의 신념을 결집시켜 다양한 개인들을 하나의 민중으로 응집하는 시멘트의 기능으로서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지점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를 ‘유기적 이데올로기'라 불렀다.
루이 알튀세르: 재생산과 이데올로기
- 맑스는 토대의 재생산, 즉 생산관계의 재생산이 순수히 경제적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즉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외적 개입 없이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관계가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고대 노예제나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는 정치적 수단인 군사력을 통해 착취 매커니즘이 지속되었다. 즉 경제 외적 요소의 개입을 통해 생산관계가 재생산된 것이다.
- 알튀세르는 앞선 맑스의 주장과 달리 토대의 재생산이 경제적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고대나 중세처럼 폭력성에만 기대 재생산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 알튀세르는 생산관계가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한 뒤 집에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충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같은 노동력의 재생산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생산관계, 즉 계급관계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상부구조'적 측면에서 기존 생산관계가 재생산되도록 하는 기능이 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 기능을 만들어 재생산을 보장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것이 국가다.
- 국가는 먼저 법을 만든다. 법 뒤에는 물리적 폭력 수단이 존재하는데, 법의 의의는 물리적 폭력 수단을 직접 휘두르지 않아도 적극적 저항을 막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에 더해 국가는 교육을 한다. 사회의 문화적 규범, 규칙 체계, 생산에 필요한 기술 등을 교육한다.
- 알튀세르는 이러한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맑스의 논의에서 빠져있음을 지적한다.
- 이 빠진 부분을 정교화하며 등장하는 것이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다.
- 억압적 국가장치는 폭력에 의해 기능한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하기도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부차적이다. 법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한다. 이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적영역에 속하기에 국가의 직접적 지휘 통제하에 있지 않고, 자율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약한 통일성이 존재하는데, 이 약한 통일성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보장된다. 가족, 학교, 교회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데올로기 일반
- 이데올로기가 개개인에게 전달되어 작동하는 매커니즘 자체는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이 형식적인 구조와 매커니즘을 이데올로기 일반이라고 한다.
- 언제,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작동하기에 이데올로기 일반은 역사를 갖지 않는다.
- 맑스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했지만,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님. 오히려 무의식에 가깝다.
- 또한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추상적인 상부구조가 아니라, 물질적인 존재를 갖는다. 이는 물질적 이데올로기 장치일 수도 있고, 물질적 행위일 수도 있고, 행위에 따른 물질적 결과일 수도 있다.
-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의 매커니즘은 과연 무엇인가? 개개인에게 상상적 관계를 표상한다. 예컨대 개개인들은 법 이데올로기에 따라 서로를 평등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님. 계급적 존재들이다. 이렇듯 개개인의 관계를 부각하거나 도외시하는 방법으로 작동한다. 여성으로서 받는 성차별, 즉 젠더적 존재를 사라지게 하고 국민으로서의 민족적 존재만 남기는 등도 같은 예시이다.
- 이 같은 매커니즘을 ‘호명'이라 한다. 호명은 개인들을 불러 주체로 만드는 것이다. 개인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유의지를 갖고 실현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오인이다.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
- 주체는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독자성을 갖지만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국가의 국민 역시 호명.
-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것은 소비자 주체이다. 내가 원해서 상품을 산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와 이데올로기
아렌트의 전체주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 핵심은 테러와 이데올로기
- 지도자 정점의 체제이다.
- 계급적 존재로서의 구성원들은 사라지고, 하나의 덩어리mass로서 대중이 등장한다.
- 정당체제는 사라지고, 대중운동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끊임없는 대중운동을 통해 지속된다.
- 실정법을 무시하고, ‘원칙'이 등장한다.
위 정의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절대 안정적인 체제가 될 수 없는데, 전체주의는 그 자체로서 운동이기 때문이다. 운동법칙의 현실에의 실현 방법이 테러고, 테러는 끊임없이 공포감을 조성한다. 또한 끊임없이 지속되는 대중운동은 권력의 고정을 막는다. 이에 기인한 체제의 불안성은 끊임없이 구성원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아렌트는 역사적으로 두번의 전체주의가 존재했다고 이야기한다.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이 그것이다.
나치즘
- 나치즘이 실정법 대신 내세운 원칙은 ‘자연법칙'으로서의 인종투쟁이다.
- 이 원칙에 따라 유태인 학살이 끝난 뒤에는 신체 및 정신 장애자들의 학살이 이어졌다.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해치는 이들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스탈리니즘
- 스탈린이 실정법 대신 내세운 원칙은 ‘역사법칙'으로서의 계급투쟁이다.
- 이 원칙에 따라 정적이 모두 제거되어도 숙청은 지속되었다. 계급투쟁으로서의 역사법칙에 따라 출신 성분이 조금이라도 부르주아와 연관되었다면 무조건 적으로 규정해 숙청하는 것이다.
- 이때 희생자와 숙청자 모두를 일반 인민 속에서 선발하는데, 각각이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다.
전체주의와 이데올로기
- 이데올로기는 사건의 경과가 ‘이념'(인종, 계급)의 논리적 전개와 동일한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역사 운동을 하나의 일관된 과정으로 설명한다.
- 아렌트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보는데, 이데올로기 자체가 모든 것과 모든 사건을 단 하나의 전제로부터 추론하여 설명하기 때문이다.
- 이데올로기 자체가 가진 전체주의적 요소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 ‘총체적 설명’을 주장하며 존재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역사에만 관심을 갖는다.
- 과거에 대한 완전한 설명, 현재에 대한 완벽한 지식, 미래에 대한 예측을 제시한다.
- 현실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한다.
- 경험가능한 현실이 아닌 ‘진실된 현실'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새로운 본질을 제시한다. 이는 인종투쟁, 계급투쟁 등.
- 현실은 본질에 따라 전도된다.
- 하나의 이념으로부터 연역하는 논리에 사실을 귀속시킨다.
- 사유가 현실, 즉 경험에서 해방되며 이념에 따른 논리는 높은 일관성을 갖추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