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와 밀접한 개념으로서 공론장에 대한 개념이 주목받기 시작한다. 공론장이란 무엇인가? 합리적 비판과 토론을 통해 여론이 형성되는 곳이 공론장이다. 이때 공론장은 '열려있어야' 한다. 사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공통의 관심사를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론장을 공개장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문예적 공론장과 정치적 공론장으로 구분한다. 그는 문예적 공론장이 먼저 발생하고 그 후 정치적 공론장이 나타났다고 보며, 부르주아 사회는 공론장을 기초로 세워졌다고 밝힌다.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사회(넓은 의미의 부르주아 사회)가 내적으로 양극화됐다고 본다. 이는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이다. 이때 사적 부문에는 상품 교환과 노동 재생산이 포함된다. 이는 즉 시장(좁은 의미의 부르주아 사회)과 가족(핵가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행위는 단순한 사적 활동이라 볼 수 없다. 상품 교환은 교환 체계 등의 요인에서 사회적 행위이며, 노동 재생산은 물가 등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사회적 차원에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적 부문에 속하지만 공적 성격을 갖는 주제들은 공론장에서 공적으로 논의가 이뤄진다.
이때 공론장에서 토론하는 이들은 상품, 자본, 노동력 등의 소유자로서의 개인이 아닌 핵가족의 사생활 영역에서 생성되는 주체성을 가진 개인이다. 또한 이들은 독서에 기반한 토론을 나누며 여론을 형성하는 '공중'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교양을 가진 개인으로서 정체화한다. 이는 부르주아 계급이 구지배계급과 스스로를 '교양'으로서 구분하는 것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공론장의 시작은 문예적 공론장이었다. 문화, 예술에 대한 비판의 중심지로서 공론장이 시작된 것이다. 공론장의 시작을 연 것은 귀족 부인들이었다. 출산 후 독립적인 삶을 사는 귀족 부인들이 살롱을 받아 좋아하는 예술가, 학자들을 초청하였고 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며 살롱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살롱은 신분, 지위에 상관없이 모두가 참석 가능했고, 이 이면에는 계몽주의와 문화의 상품화가 존재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계몽주의 정신과 문화 상품화를 통한 예술에 대한 높은 접근성이 살롱의 공중 개방적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경우 문예적 공론장을 이야기할 때 살롱과 커피하우스를 함께 이야기하지만, 루이스 코저의 경우 둘을 구분한다. 주제의 다양성과 공론장이 요구하는 공중 개방성에 있어 살롱보다는 커피하우스가 더 이상적 공론장의 형태에 근접하다는 이유에서다. 살롱의 경우 운영자인 귀족 부인의 취향에 따라 논의 주제가 제한될 수 밖에 없으나, 커피하우스 내의 고객들은 내부에 비치된 읽을 거리를 기반으로 주제에 제한 없는 자율적 논의를 나누게 된다. 또한 살롱의 경우 내부에서는 평등함이 전제되지만 입장에 있어 완전히 개방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반면 커피하우스는 상업 공간으로 돈만 낼 경우 누구나 허가 없이 출입이 가능했다. 다만 18세기 이후, 커피하우스 역시 살롱과 같이 폐쇄적 성격을 띈 '클럽'으로 변모하게 된다.
공론장에서의 논의는 차츰 문예적 비판에서 정치적 비판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간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공론장의 제도적 형태가 드러나는데, 그것이 '의회'다. 이는 18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형태가 아닌, 중세시대 귀족 협의체의 그것을 기반으로 한다.
정치적 공론장은 공권력에 대항하는 성격을 갖는다. 개인들의 이해관계를 공권력에 대항해 보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공론장은 법이 일반적, 추상적, 평등하게 적용될 것을 요구했다. 이에는 역시 이성을 가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계몽주의 정신이 이면에 존재한다. 계몽주의 정신은 이미 문예적 공론장에서 확인된 바 있으며, 문예적 공론장에 참여한 공중들은 서로를 평등하고 교양있는 사람들로 인식한다.
그러나 정치적 공론장에서 진행되는 논의는 보다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다루기 때문에 단순히 '평등한 인간' 외에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소유자'로서의 정체성이다.
사실 '인간'과 '소유자'라는 두 정체성은 괴리가 있을 수 밖에 없으나, 공론장에서의 경험은 공중의 개인들로 하여금 이 두가지를 결합시키도록 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하버마스는 정치적 공론장이 완성되자마자 쇠퇴했다고 평가한다. 사적 부문, 공적 부문의 경계가 와해됨에 따라 '온전한' 사적 부문이 핵가족으로 축소되었고, 고전적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사적 부문에 속했던 공론장이 그 위치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는 축소된 핵가족이라는 사적 부문 역시 공적 부문의 간섭과 침해를 받는다. 이는 국가 관리 보험 체계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문화를 토론하던 공중이 문화를 소비하는 공중으로 변화하게 된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저항감 없이 소비가능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문화는 정치 및 사회적으로 예민한 사항을 다루지 않으며 정치적 성격을 잃게 된다. 여가 역시 생산과 소비의 순환에 편입된다. 인간으로서 휴식을 취하고 충전하는 활동이 아닌 또 다른 상품을 구매해 소비하는 활동으로 여가가 정의된다.
공적 부문과 사적 부문의 상호침투가 진행되며 공론장이 그 기능을 잃게 되자 개인들은 공론장이라는 매개 없이 직접 국가에 이해관계 관철을 위한 경쟁을 시작한다. 즉 사적 개인들이 공적 논의를 통해 공동 이익을 도출하던 정치적 공론장의 기능 자체가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공론장의 형태였던 의회는 사라지고 정당으로 그 제도가 변화했고, 공론장은 대중매체에 의한 광고로 가득한 공간으로 변질되었으며, 여론은 여론조사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쇠퇴한 정치적 공론장의 한계 극복을 위해 등장한 것이 평민적 공론장이다. 교양이 없는, 교육 받지 못한 생산 대중들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공론장이 그것이다. 상퀼로트 운동, 차티스트 운동이 대표적인 예시다.
E.P 톰슨이 제시하는 평민적 공론장은 급진주의 노동자들의 신문 열람실, 독서실, 자체 신물 발행 등이다. 이는 사실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광고를 수주해 운영되는 신문의 특성 상 광고를 싣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공권력의 억압보다 자본주의 산업화 논리에 의해 노동자 계급 자체의 언론이 위축된 것이다.
로이 알란 로젠버그가 제시하는 평민적 공론장의 형태는 미국의 선술집과 영국의 펍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 내에서는 공동체주의적 성격이 강했는데, 이를 지속시켜주는 공간이 선술집이었다. 노동자들이 모여 서로 술과 음식을 사는 행위를 통해 연대 의식을 확인하고, 공동의 사안에 대해 논의 및 집단 대처하는 공간으로서 선술집이 존재했던 것이다. 일종의 대항문화 공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펍 역시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평민적 공론장의 예시로 꼽힌다.